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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에 함부로 동의하지 말 것

계약에 함부로 동의하지 말 것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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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열 6,600 2024-04-03 로판 전2권 979-11-7231-976-2
  • “네가 모아야 할 건 수컷의 정액이야. 정확히 말하면 그 안에 든 생기를 모으는 거지.”
  • 사람을 쳤다. 내가. 차로.
    떨리는 손으로 자진 신고를 하려던 그때,
    악마가 나타나 손을 내밀었다.

    “나와 계약하자.”

    관절이 도드라진 손가락이 언뜻 까닥였다.

    “나는 이 사고를 없었던 일로 처리해 주고,
    너는 차원을 돌면서 어떤 매개를 모아 오면 되는 거다.
    아, 인간이 어떻게 차원을 오갈 수 있냐는 미련한 질문은 하지 말고.”

    계약만 하면 사고를 없던 일로 만들어 주겠다는 완벽한 타이밍과 알 수 없는 조건.
    모든 게 수상했지만, 그런 걸 따질 정신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모아야 하는 게 정확히 뭔데?”
    “네가 모아야 할 건 수컷의 정액이야. 정확히 말하면 그 안에 든 생기를 모으는 거지.”

    그렇게 함부로 계약을 맺은 대가는 처참했다.

    “신사적이고 정력적인 상대들로만 엄선해 놨으니, 넌 우리한테 감사하는 게 좋아.”

    악마가 웃었다.

    ***

    이미 벌어진 일, 후회는 소용없다.
    남은 건 최대한 빨리 필요한 생명력을 모아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나는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미래를 꿈꾸며 낯선 차원, 낯선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얼마 뒤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낮고 울림이 묵직한, 상당히 근사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가 부디 목소리만큼 근사한 신사이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헛것을 보나 했는데, 인간이군.”
    “…….”
    “평범한.”

    남자를 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엄선했다더니 악마들의 기준에 외형은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텅 비어 있는 목깃 위를 보며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제발, 투명 인간이랑 뭘 하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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