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의 딸로 태어나 한순간도 제 뜻대로 살아온 적 없는 지원.
아버지는 겨우 이룬 건실한 직장도 친구도 지인도 모두 순식간에 빼앗았다.
결혼마저 뜻대로 할 수 없어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을 때.
“기다려, 조금만.”
10년 만에 갑자기 나타난 옛 친구이자 첫사랑인 현수는 의미 모를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곧바로 들려온 예비 신랑의 사망 소식에 지원은 왠지 모를 불안에 시달린다.
그 후, 현수는 지원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우연히 나타나 도움을 주는데…….
이 모든 우연을 진짜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차 안에 히터를 틀어 놓아 조금 더웠다. 나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무릎에 올려 두었다.
그러자 현수가 나를 힐끔거리더니.
“재킷 입어.”
“응?”
“입으라고.”
더운데 왜 입으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가 차창으로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아차 싶었다. 원피스 목 부분이 다 뜯어져 브래지어와 깊게 파인 가슴골까지 모조리 보였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져 다시 재킷으로 몸을 가렸다. 어쩌면 아까 현수가 차에서 내린 나에게 재킷을 입혀 준 이유도 이것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잠시 내 가슴 쪽에 스친 그의 시선이 묘했던 거 같기도 하고…….
갑자기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어이없게도 기대감이 차올랐다.
현수가 어쩌면 나를 조금은 여자로 볼 수도 있겠다는, 그런 기대감이.
그때, 오래전에 우리가 오랫동안 헤어질 줄 모르고 다음 날이 있을 줄로만 알았던 때가 떠올랐다.
다음 따윈 없어.
고백하지 못했음을 오래도록 후회했다. 아마 오늘이 지나면 나는 또 오랫동안 번민하며 후회할지 모른다.
그래서 멈출 수 없었다.
“현수야.”
조용히 부르자 현수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왜.”
그만해, 정지원.
하지만 나는 멈추지 못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저번에 장례식장에서 헤어지기 전에 네가 했던 말 있잖아.”
“…….”
“내가 부탁하면 뭐든 다 들어주겠다는 말…….”
“…….”
“여전히 유효해?”
현수의 차가 조금 느려졌다. 그는 생각하는 듯싶더니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그래, 유효해.”
예상했던 대답에 나는 더욱 힘을 받았다. 버석 말라 버린 입술을 혀로 살짝 훔쳐 내었다가 말했다.
“그럼 거기에…… 섹스도 포함될 수 있어?”
갑자기 차에 빠른 속력이 붙었다. 급속도로 내달리던 차가 갑자기 끼이익, 큰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