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알았소. 내 언제 얘기하지 않았소? 사형은 비옥토를 품은 천둥지기라 비만 내려 주면 최고의 사랑꾼이 될 거라고.”
굵직한 세가와 소문난 수전노의 집만을 터는 생계형 도적, 민현.
패물이나 털러 간 최 대감 댁에서 발목에 쇠고랑을 차고 있던 첩실을 도와주게 된다.
범상치 않은 행동거지로 민현을 얼빠지게 한 여인네는 복수를 위해 한성으로 가야 한다며 무작정 길을 나서려 했다.
기개만큼은 인정하겠으나,
자신이 가야 할 방향도 몰라 어수선하게 구는 여인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민현은 결국 동행하게 된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최 대감의 마수를 피하기 위해 여인네에게 ‘은동’이란 가명과 함께 남장을 시킨 민현.
공유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두 사람은 가까워지고, 생소한 감정도 싹튼다.
가슴에 비옥토를 품었으나 물길이 닿지 않아 황폐하게 메말랐던 천둥지기에, 다소 소란하지만 티 없이 맑고 순수한 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미리보기>
‘도, 도련님?!’
때맞춰 등장해 준 겸인의 말 덕분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민현의 부릅뜬 눈이, 여태 제가 은동이라 불렀던 녀석에게로 향했다. 사정없이 동공이 흔들리고 있는 민현을 바로 보지 못해 고개를 숙인 은동이 떨리는 소리로 사정을 말했다.
“말…하려고 했소….”
그 말에 머릿속에서 엉켜 있던 실타래가, 풀어진 것도 아니고 그냥 툭 끊어져 버렸다.
‘나, 남자였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민현은, 모든 정황상 확실하다 못해 이미 대못이 쾅 박혀 버린 사실에 대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남자야?”
“…….”
은동은 숙인 채로 끄덕,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인지라 반걸음을 비척거린 민현이 손에 들고 있던 옷을 떨어트리고 이마를 짚었다. 열 기운 때문인 건지, 아니면 아까 툭 끊어져 버린 머릿속이 고장이라도 나 버린 건지, 그저 빙빙 돌기만 할 뿐 좀처럼 올바른 사고가 되질 않았다.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쳐 오르는 화에 제대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던 민현은 잡았던 팔을 놓고 대뜸 아래로 손을 뻗었다. 은동의 저고리 아랫자락을 걷어 올리고 바지 고름을 풀었다.
민현이 바지 고름을 거칠게 끌어당겨 풀어내는데도 저항하지 않는 녀석은 그저 후둑후둑 눈물만 떨구고 있었다. 그러고 서서, “미안하오…. 미안하오…,” 하며 하염없이 속죄의 말만 하고 있었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욕설을 짓씹은 민현은 고름을 모두 풀어낸 바지를 속곳과 함께 잡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