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에 나온 정보는 이미 다 활용됐고, 인재들은 다 제자리를 찾았고, 남주를 비롯한 로맨스 대상들은 다 여주가 가진, 뭘 더 할 수도 없는 완결 난 소설에 빙의해 버렸다.
기껏 빙의한 소설이 완결이라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백작위를 강탈하려는 작은아버지 때문에 진짜 죽게 생겼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무작정 서브 남주 발렌시아 대공에게 매달려 가신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
나는 그로부터 계약 결혼 제의를 받았다.
어차피 남자도 없고, 결혼 생각도 없고, 주군은 영원히 마음에 담아 둔 여자가 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동의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착각을 했나 보다. 차도남 대공님이 매일 밤, 치대기 시작했다.
* * *
“지금, 어, 지금 이게 뭐 하시는 겁니까?”
“몰라서 묻는 건가?”
축축한 살덩이가 귓속을 가득 채웠다. 더불어 고막에 때려 박히는 낮고 더운 목소리에 몸의 체온이 올라가고 아랫배가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도 듣기 좋다고 생각했던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색기까지 철철 흘러넘쳤다.
“초야를 치르는 중이지 않나.”
“초, 초야라니요!”
심장이 덜컥 떨어져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초야라니, 초야라니! 계약 부부에 초야가 웬 말인가!
“그런, 그런 말은 없었잖아요!”
“무슨 말?”
“초야를, 치를 거라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초야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하겠다는 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는다는 말도 없었다. 계약서에 단어로 언급되고 계약 시 대화로 나누었던 조항은 합의에 의한다는 기간, 대외적으로 애정을 과시한다는 것, 비밀을 유지한다는 것, 그리고 부부 생활에 충실해야 한다는….
“서로에게 충실하고 애정이 넘치는 신혼부부가 초야를 치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