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구간
맹수의 영역

맹수의 영역 19

2,300
상세정보
  • 마뇽 2,300 2019-07-12 로맨스 전1권 979-11-90146-51-7
  • “그쪽 아내가 되면, 그 호랑이를 잡아주는 것이오?” 그냥 한번 던져본 곽오주의 말에 효인은 정말 무엇이라도 할 마음이 있다는 듯, 당장 혼인이라도 할 기세였다. 곽오주는 여인을 떨쳐내려다가 잘못 꿰어 절령의 대호를 잡으러 떠난다.
  • 어느날 곽오주를 찾아온 양반 처녀 서효인.


    “뭐든지, 준다고 했소.”
    여인이 쓰고 있던 장옷을 벗은 것은 그때였다.
    솜을 누빈 배자를 입고 머리에 아얌을 쓴 여인은 사내의 짐작대로 어림잡아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젊은 처녀였다.
    비녀를 쪽진 것이 아니라 댕기를 드리운 것을 보니 처녀가 분명했다.
    ‘소복이라….’
    그런데 입고 있는 것이 소복이다.
    댕기도 흰 것으로 드리웠고 흰 배자에 흰 저고리, 흰 치마까지. 쓰고 있던 장옷만 빼면 금방 상을 당한 사람의 복색이다.
    입고 있는 소복보다 더 새하얀 얼굴이 뽀얗다 못해 창백하지만 그 위에 드리워진 짙고 긴 속눈썹이 유난히 눈길을 사로잡았다.
    흰 눈 위에 핏방울이 떨어지면 저런 얼굴일까.
    창백한 얼굴에 붉은 입술이 두드러졌다.
    입술 연지를 바른 것도 아닌데 입술이 붉었다.
    붉고 도톰한 입술.
    그리고 쭉 뻗은 가는 목.
    그러나 도도한 눈매.
    문득 처녀의 이름이 궁금해진 사내였다.
    “이름이 뭐요.”
    “서효인이요.”
    서씨 성을 가진 양반의 처녀.
    “상을 당했소?”
    “오라비가 죽었소.”
    “어쩌다 죽었소?”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소.”
    그제야 사내가 처녀의 눈매가 왜 그리 독한지 이해할 수 있었다.
    “대답만 하시오. 그 호랑이를 잡아줄 건지 말건지. 그 호랑이를 잡아주기만 하면 원하는 건 뭐든 주겠소.”
    효인의 말에 사내가 묵묵히 제 소매를 걷었다.
    팔뚝까지 소매를 걷자 사내의 팔뚝에 새겨진 낙인이 드러났다.
    자자형을 받은 것이 틀림없는 낙인의 자국이었다.
    “이런 놈이라 장가를 오겠다는 여자도 없는데, 이렇게 하면 내가 그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소. 나한테 시집오겠다고 하면 말이오.”
    당연히 거절할 거라 생각을 했다.
    어느 양반 처녀가 자자형을 받은 천한 호랑이 사냥꾼에게 시집을 오겠는가.
    그것도 저리 고운 처녀가 말이다.
    “그거면 되는 것이오?”
    그러나 처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쪽 아내가 되면, 그 호랑이를 잡아주는 것이오?”
    ‘미친 건가?’
    곽오주는 저 처녀가 실성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중략)

    어둠 속이지만 유난히 흰 살결은 잘도 보였다.
    희고 깨끗한 살결에 봉긋한 젖가슴. 그리고 잘록한 허리.
    옷을 입혀 놓았을 때나 벗었을 때나 똑같이 가녀린 몸이다.
    저 몸으로 산을 어찌 오를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
    효인이 제가 깔고 앉은 사내를 내려다봤다.
    바위처럼 단단한 허벅지가 엉덩이 아래로 느껴지고 있었다.
    이 사내와 닿은 것은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손 한 번 잡아준 적이 없다.
    길을 걷다가 발이 아파 주저앉아도 이 사내는 흔하게 손 한 번 내밀어 잡아 일으켜준 적이 없다.
    만약 손을 잡아주었더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한번 도움을 받아 의지하기 시작했으면 절대로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고 이 사내도 저를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손을 바라는 것은 스스로가 짐 덩어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니까, 손을 내밀지도 않았고 내밀어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때 사내의 손이 효인의 다리를 만져왔다.
    솜을 넣은 바지 위로 사내의 손이 더듬어오자 효인이 몸을 떨었다.
    직접 닿은 것도 아닌데 그 손이 닿자 허리가 떨렸다.
    사내의 손은 효인의 허벅지를 더듬어 올라가다가 그녀의 허리에서 멈췄다.
    그 손이 제 허리보다 더 크다고 효인이 생각했다.
    “아….”
    그때 사내가 효인의 몸을 뒤집었다.
    졸지에 사내의 아래에 깔린 효인이 제 위에 올라탄 사내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자세가 역전이 되고 말았다.
    자신보다 두 배나 큰 사내의 아래에 깔렸는데도 무겁지 않았다.
    그건 사내가 일부러 무릎을 세워 효인에게 무게를 싣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자는 것이오?”
    사내가 허리를 숙여 효인의 얼굴 바로 위에서 속삭였다.
    그 숨결이 뺨의 살결에 닿자 효인의 귀가 달아올랐다.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사내의 물음에 효인이 대답대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잠시 후 효인의 목덜미에 사내의 단단한 손바닥이 닿았다.
    거칠면서도 단단한 손바닥이 효인의 목덜미와 뺨을 천천히 훑었다.
    그 까슬한 손바닥이 제 뺨과 목덜미를 훑을 때마다 효인이 숨을 삼켜야 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숨이 조금씩 막혀왔다.
    그 손바닥이 저를 계속 만져대자 결국에는 효인이 눈을 떴다.
    그녀가 눈을 뜨기 전에는 만지는 것 외에 무엇도 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 손놀림이 느껴지는 까닭이었다.
    눈을 뜨자 효인의 눈동자에 사내가 비쳤다.
    어둠 속에서도 마치 대낮인 것처럼 사내가 그녀의 눈에 담겼다.
    아마도 밖에서 일렁거리는 횃불의 불빛이 스며들어와서 그럴 것이다.
    그 불그스레한 불빛이 효인의 눈을 밝혀 제 위에 앉은 사내를 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사내는 효인이 그랬던 것처럼 저고리를 벗었다.
    저고리를 벗는 사내의 팔뚝이 효인의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에 올라탔던 허벅지가 그리 단단한 바위처럼 느껴졌었는데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팔뚝 역시 단단해보였다.
    단단하게 굳은 가슴의 근육과 손으로 눌러도 들어갈 틈도 없어 보이는 복근. 그리고 고랑이 파인 쇄골과 거친 어깨의 근육.
    사내의 몸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죽은 오라비가 등에 약을 발라달라고 할 때면 그 벗은 등을 보았었다.
    오라비도 무관이었다.
    칼을 쥐고 말을 타고 억센 일을 하는 무관인지라 몸이 단단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이 사내의 몸과는 달랐다.
    이 사내의 몸은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거칠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아름답다고 해야 할까.
    이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의 몸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일까.


    호랑이를 잡아야 하는 여자 서효인.
    호랑이를 잡아주고 싶은 사내 곽오주.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벗어나지 못하는 맹수의 영역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이들.
    맹수보다 더 사나운 사내와, 귀신보다 더 독한 여자의 동행.
×